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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21일 목요일

"우주에서 빛보다 더 빠른 것이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옳다



"양자 얽힘"은 신비한 것도 불가사의도 아니다. 갑과 을이 정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항상 하나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로서 존재하고 하나로서 움직인다. 그러나 성질은 정반대다. 정반대가 아니라면 하나가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빛이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것이 3위1체 원리의 동일성(동시성-동시에 움직이므로)과 양면성이다. 하나이기 때문에 쌍둥이처럼 짝을 이룬 두 입자를 아무리 분리해놓아도 '하나'로서 움직이지 '둘'로 독립적으로는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만 알면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가 된다. 


왜 하나로만 자기 모습을 표현할 줄밖에 모르느냐 하면 현재의 갑과 을이 전에는 갑 홀로 하나로 존재했는데 즉 병으로 있었는데, 자기의 닮은꼴을 파생시켰기 때문에 둘로 되어 있어 갑과 을이 되어 있을 뿐이므로, 여전히 과거 홀로 존재하던 그 병의 모습을 유지 보전하려는 성질 때문이니 이는 극히 자연스럽다. 본질은 같으나 성질은 다르다는 것뿐이니, 본질이 같으므로 하나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둘로서의 짝을 이루어 오고 있는지 아니면 중도에 그런 짝을 이룰 수도 있는지는 불명이나, 어쨌든 짝을 일단 이루면 인과, 주종, 대소, 선후 관계를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반드시 움직인다는 것만은 명백한 것이다. 




In 1927 one of the most famous scientific meetings in all of history was held and it was owing to a disagreement between Albert Einstein and Niels Bohr. Were electron, light, and similar entities waves or particles? Who's wrong? No one has answered so far. It's Einstein! This is the decision of the law of Trinity. It is because Bohr believed in 'duality as unity' of the law of Trinity, while Einstein denied it.


Our universe is not a mysterious place. It has been governed and maintained by this plainly-revealed law of Trinity. The
 complementarity principle, however, is not perfect, nor the yin/yang philosophy, as they do not tell us that one is begotten by the other. This is the very core of the Law, for it explains the 'duality as unity', namely, 'Oneness' as spoken by the Last Adam Jesus Christ. "Quantum Entanglement" is none other than this expression of "Duality as Unity".

They say that while scientists now have the best proof that quantum entanglement does occur, no one has been able to explain
  the why. It just operates the 'unity as duality' of the law of Trinity. This is the reason why pairs of sub-atomic particles can be invisibly connected in a way that transcends, as they say, "time and space" and "no matter how far apart they are, the state of one particle influences the state of the other".

So the instantaneousness of entanglement does not have any 'speed' at all. It does not break any laws of relativity.'Oneness' of the two particles facilitates it. Hence the theory of relativity in the line of 'Light is the fastest thing, there is nothing faster' is not touched by the entanglement. The term of "Supersymmetry", in a sense, may fit in with the 'duality as unity' or "unity as duality".



Niels Bohr(1885-1962) was one of the greatest physicists of the 20’th century. He must have been inspired by the yin/yang philosophy. In 1947, King of Denmark Frederick IX announced that he was conferring the Order of the Elephant on Bohr. Bohr designed his own coat of arms which featured a symbol of yin and yang and a motto in Latin: contraria sunt complementa, “opposites are complementary.”





2016년 1월 16일 토요일

양자간(兩者間)의 결합



두 소립자 간의 융합, 결집, 결합이다. 셋 또는 그 이상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정반대 성질로서의 이질적인 것의 하나됨'의 또 하나의 특성이다. 다자간이 아닌 오직 양자 관계다. 말 그대로 '정반대'라면 양면성을 말하는 것이지 그것이 다종다양화할 수는 없는 일. 이는 만물 만상이 모두 짝으로 되어 있다는 데에서 입증되고 있다. 그것을 실제 이론적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 3위1체 원리이다. 이 사실이 보어와 아인슈타인과의 논쟁에서 표면화되기 시작했고 소위 "양자 얽힘"에서 검증되었다고 할까.

이러한 대칭(상칭, 대립)성이 우리에게는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왜냐면 오늘날까지 우리 인류는 가시적인 자연계 하나만 의식하고 있었는데 그 정반대인 세계가 존립하고 있다는 사실에 와서는 모든 생활 패턴에서의 일대 혁신이 불가피해지기 때문이다. 즉 이 자연계를 초월하는 초 자연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가설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상과 같은 새로운 발견 실험 검증을 통해 명백히 그 자태를 나타내고 있는 오늘날 현실이기 때문이다.

두 반대되는 것끼리 어찌 하나로 융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논리였다. 빛을 입자성의 견지에서 실험하면 입자성으로만 나타나지 기타의 것은 일절 배격하기 때문이다. 또 파동성으로 취급하면 입자성의 의미는 결단코 용납하지 않는 것. 이것이 "정반대되는" 것의 의미다. 갑과 을이 하나로 되어 있으나 갑이든 을이든 그 개체로만 살피면 갑은 을이 아니고 을은 갑이 아니기 때문이니 상호 배타적이어야 함은 지당하다. 이 짝의 개념은 종국적으로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대칭성으로 이어짐은 자연스러우므로 자연계에만 한정되어 있는 현재까지의 과학적 증험이 초자연계로 이어지기에는 마치 갓난 아이와 같아 가히 그 영역에까지 미치지 못함이다.

자연과학자로서의 아인슈타인이 보어의 양립성의 견해를 수용하지 못한 것은 고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오직 인식 전환만이 필요한 까닭이다. 손등을 뒤집으면 손바닥이 되는 것뿐이지 그 어떤 다른 것으로 되지 않는다. 손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정도의 시각, 관점만 요구되는 것뿐이다. 세세한 부문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머리를 싸맬 정도로 골치 아프겠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큰 가닥만 추스려 가는 관계로 어린 아이라도 알 수 있는 평범한 지식으로 집약된다. 세세한 부문에서 갈피를 못잡을 정도로 애를 먹은 관계로 최 정상으로는 얼마나 더 힘들고 난해할까 하는 선입관이 그릇된 판단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초자연계. 그렇다, 우리는 여기에 정작 눈을 떠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는다 한들 자기 목숨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냐"(마 16:26) 성경에 말씀하신 그대로다. 인간의 본연적, 본원적 모습은 초자연계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 정반대인 자연계에 속한 몰골로 되어 있느냐, 이것을 구명함이 다른 것 일절 젖혀놓고라도 구명해야 할 것이건만 본질은 정작 놓치고 지엽적인 것에다 머리를 박고 있었던 것이다. 양자 컴퓨터 수백 만개를 만들어 놓은들 그것이 내 생명에 무슨 관계가 되는가. 내가 오늘 이 시간이라도 숨 끊어져 송장으로 변해 버리면 그 기술이 도대체 내게 무슨 의미가 되느냐 하는 그 뜻이다. 그런 지식을 갖춤으로써 내가 영원히 죽지 않는 초자연계 존재라도 된다는 말인가? 우리가 초자연계 몸이 되면 오히려 그런 수백만 개 양자 컴퓨터 기능을 자체적으로 너끈하게 처리해내는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을. 

이 양자간 대립 관계에서, 존재 인멸이 죽음이 아니다. 육체가 썩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연계 측면에서의 이야기다. 이 자연계와 대립되는 초자연계 측면에서는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여기 이 한시적인 세계에서는 죽음도 일시적이나, 영원한 초능력의 세계에서는 죽음은 생명과의 대칭(상칭)적 의미로서 고난, 고통만이 영속된다. 다시 말해 이 찰나적인 자연계 영역에서 장차 임하기로 예정되어 대기 중인 초자연계에 임할 것을 대비하는 의미에서 이 불확실성의 세월을 잠깐 잡고 있는 것뿐이지 장차 '나(自我)'라는 존재는 끝도 한도 없이 이어지게 되어 있다. 그것이 생명인가, 멸망이라는 고난, 고통인가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양자간의 하나로서의 융합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자 얽힘"으로써 그 윤곽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3위1체 원리를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는 이유다. "3위1체"라는 표현도 정확히 말하면 "1시(始)2원(元)3위(位)1체(體)"다. "3위'라 하면 3개의 개체란 뜻이 얼른 먼저 와 닿기 때문이다. 즉 이 세상은 동전의 양면성에서의 그 일면일 뿐이다. 나머지 한 면이 그 어마어마한 영원성으로써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눈떠야 한다는 것이다. 

앞 못보는 사람들 코끼리 만지고 저들끼리 코끼리 주제를 놓고 입씨름하는 꼴








퉁구스 사건과 NASA photo(우연히 찍힌 거대한 뱀 즉 용에 대한 사진)에 대해서는 다른 블로그
http://blog.daum.net/trinia/16에서 누차 설명하였으므로 차후에 기회 있는 대로 추가 해석을 하겠거니와,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에 대해서는 추가 설명이 아니라 되풀이해서 주지 인식시킬 필요가 있어 강조하는 것인 바, "양자 세계에서 두 입자가 아무리 먼 거리로 상격해 있다 하더라도 상호 연결되어 있는 증거로서 한 입자의 상태가 측정되면 나머지 다른 입자의 상태도 즉각적 반응을 보여 결정되되 반드시 그 반대되는 것으로 결정이 되는데 거리와는 상관 없이 결합되어 상대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아인슈타인은 처음부터 이를 양자 이론에서의 "우연"과 "예측 불가능성"이라 해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다.

두 입자가 "텔레파시 같은 방법으로 묶이는 먼 곳에서의 유령 같은 작용"이라 조롱했던 것인데, 그 두 입자가 살아 있는 생물이라 서로 정보를 교환하여 그런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 둘은 하나로서 처음부터 반대되는 성질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니 그들끼리 무슨 정보를 교환한 것이 아니라 그 애초의 성질을 나타내는 것뿐인 것이다.  a와 b라는 두 입자는, 하나가 a 성질을 갖고 있으면 그 조건에 따라 다른 하나가 b라는 정반대되는성질을 갖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a는 a 성질을 b는 b의 성질을 지니고 있었을 따름이니 즉 고유의 성질인 것이다. 아니라면 처음부터 a입자가 b성질을 띄게 되면 b입자는 무조건 그 반대되는 성질 즉 a성질을 띠게 되어 있는 것이든가. 무슨 정보를 저들끼리 교환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a와 b의 성질이 정반대라야지, 같으면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석의 다른 극끼리만 서로 달라붙듯이.  


설명의 핵심은, 그 둘이 각기 자기 특성이 있지만, 존재하고 작용하는 데에서는 반드시 하나로서 그리고 각기 상반되는 것으로서 움직인다는 이 사실에 있는 것. 그리고 더 중요한 핵심은, 이 점에 대해서는 "아인슈타인은 틀렸고 보어 역시 몰랐다"가 되는데 왜 그러냐 하면 이 둘이 하나로 작용하는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니,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인정했을 뿐이지 그 <이유>를 석명할 수 없었던 것인데, 그러니 틀리고 맞고를 떠나서 두 사람 다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으로서, 무엇을 몰랐느냐 하면 이 둘은 상호 대등한 것이 아니라 모자(母子) 관계 즉 파생시키고 파생되는 관계로서 인과(因果), 선후(先後), 주종(主從), 대소(大小)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하나로 존재하던 것이 그 하나에서 또 하나의 닮은꼴이 생성되어 현재 둘로 존재하나 그 원래의 하나로서의 위치, 성질, 작용을 그대로 유지 존속시키려는 성질이 있어 여전히 하나로서 존재하고 작용하는 고로 그와 같은 양자 얽힘과 같은 현상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 새삼스럽게 서로가 결합하는 것도 아니고 원래 둘로서 독립적이지만 작용은 하나로서 마치 한 개체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 바로 그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인슈타인 말마따나 "텔레파시 같은 방법으로 묶이는 먼 곳에서의 유령 같은 작용"이라 말하게 되는데, 이 "얽힘"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 즉 하나로서의 인과, 선후, 주종, 대소 관계를 모른다면 아인슈타인의 인식과 기타 그를 틀렸다고 주장하는 이들과의 인식이 50보 100보 차이일 뿐이다.


처음부터 이런 사실을 설명하여 밝히는 성경의 진실성을 외면하는 데에서 오는 그들의 완고함, 완강한 고집에 기인되는 것이다. 앞을 못보는 이들이 코끼리를 만짐으로써 인식하려 하나, 보지 못하는 절대적인 장벽 앞에서 무기력하므로 자기가 경험(실험, 검증)한 범위 내에서만 서로 네가 옳거니 내가 옳거니 하고 다투는 꼴이다. 먼저 <보는 것>부터가 선결 과제다.   그렇지 않고서는 시간 낭비, 정력 낭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항상 그 자리가 그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