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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6일 토요일

양자간(兩者間)의 결합



두 소립자 간의 융합, 결집, 결합이다. 셋 또는 그 이상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정반대 성질로서의 이질적인 것의 하나됨'의 또 하나의 특성이다. 다자간이 아닌 오직 양자 관계다. 말 그대로 '정반대'라면 양면성을 말하는 것이지 그것이 다종다양화할 수는 없는 일. 이는 만물 만상이 모두 짝으로 되어 있다는 데에서 입증되고 있다. 그것을 실제 이론적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 3위1체 원리이다. 이 사실이 보어와 아인슈타인과의 논쟁에서 표면화되기 시작했고 소위 "양자 얽힘"에서 검증되었다고 할까.

이러한 대칭(상칭, 대립)성이 우리에게는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왜냐면 오늘날까지 우리 인류는 가시적인 자연계 하나만 의식하고 있었는데 그 정반대인 세계가 존립하고 있다는 사실에 와서는 모든 생활 패턴에서의 일대 혁신이 불가피해지기 때문이다. 즉 이 자연계를 초월하는 초 자연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가설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상과 같은 새로운 발견 실험 검증을 통해 명백히 그 자태를 나타내고 있는 오늘날 현실이기 때문이다.

두 반대되는 것끼리 어찌 하나로 융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논리였다. 빛을 입자성의 견지에서 실험하면 입자성으로만 나타나지 기타의 것은 일절 배격하기 때문이다. 또 파동성으로 취급하면 입자성의 의미는 결단코 용납하지 않는 것. 이것이 "정반대되는" 것의 의미다. 갑과 을이 하나로 되어 있으나 갑이든 을이든 그 개체로만 살피면 갑은 을이 아니고 을은 갑이 아니기 때문이니 상호 배타적이어야 함은 지당하다. 이 짝의 개념은 종국적으로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대칭성으로 이어짐은 자연스러우므로 자연계에만 한정되어 있는 현재까지의 과학적 증험이 초자연계로 이어지기에는 마치 갓난 아이와 같아 가히 그 영역에까지 미치지 못함이다.

자연과학자로서의 아인슈타인이 보어의 양립성의 견해를 수용하지 못한 것은 고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오직 인식 전환만이 필요한 까닭이다. 손등을 뒤집으면 손바닥이 되는 것뿐이지 그 어떤 다른 것으로 되지 않는다. 손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정도의 시각, 관점만 요구되는 것뿐이다. 세세한 부문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머리를 싸맬 정도로 골치 아프겠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큰 가닥만 추스려 가는 관계로 어린 아이라도 알 수 있는 평범한 지식으로 집약된다. 세세한 부문에서 갈피를 못잡을 정도로 애를 먹은 관계로 최 정상으로는 얼마나 더 힘들고 난해할까 하는 선입관이 그릇된 판단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초자연계. 그렇다, 우리는 여기에 정작 눈을 떠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는다 한들 자기 목숨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냐"(마 16:26) 성경에 말씀하신 그대로다. 인간의 본연적, 본원적 모습은 초자연계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 정반대인 자연계에 속한 몰골로 되어 있느냐, 이것을 구명함이 다른 것 일절 젖혀놓고라도 구명해야 할 것이건만 본질은 정작 놓치고 지엽적인 것에다 머리를 박고 있었던 것이다. 양자 컴퓨터 수백 만개를 만들어 놓은들 그것이 내 생명에 무슨 관계가 되는가. 내가 오늘 이 시간이라도 숨 끊어져 송장으로 변해 버리면 그 기술이 도대체 내게 무슨 의미가 되느냐 하는 그 뜻이다. 그런 지식을 갖춤으로써 내가 영원히 죽지 않는 초자연계 존재라도 된다는 말인가? 우리가 초자연계 몸이 되면 오히려 그런 수백만 개 양자 컴퓨터 기능을 자체적으로 너끈하게 처리해내는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을. 

이 양자간 대립 관계에서, 존재 인멸이 죽음이 아니다. 육체가 썩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연계 측면에서의 이야기다. 이 자연계와 대립되는 초자연계 측면에서는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여기 이 한시적인 세계에서는 죽음도 일시적이나, 영원한 초능력의 세계에서는 죽음은 생명과의 대칭(상칭)적 의미로서 고난, 고통만이 영속된다. 다시 말해 이 찰나적인 자연계 영역에서 장차 임하기로 예정되어 대기 중인 초자연계에 임할 것을 대비하는 의미에서 이 불확실성의 세월을 잠깐 잡고 있는 것뿐이지 장차 '나(自我)'라는 존재는 끝도 한도 없이 이어지게 되어 있다. 그것이 생명인가, 멸망이라는 고난, 고통인가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양자간의 하나로서의 융합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자 얽힘"으로써 그 윤곽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3위1체 원리를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는 이유다. "3위1체"라는 표현도 정확히 말하면 "1시(始)2원(元)3위(位)1체(體)"다. "3위'라 하면 3개의 개체란 뜻이 얼른 먼저 와 닿기 때문이다. 즉 이 세상은 동전의 양면성에서의 그 일면일 뿐이다. 나머지 한 면이 그 어마어마한 영원성으로써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눈떠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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