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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15일 화요일

모든 피조물이 함께 더불어 산고(産苦) 중에 있는데 당신 홀로 태평연월인가

모든 피조물이 함께 더불어 산고(産苦) 중에 있는데 당신 홀로 태평연월인가



누구든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는가.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약 4:4)이라 한 대로 세상 사랑은 수십 억 생명을 몰살시키기에 충분한 마약이다.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에서 살고자 하고 삶의 낙을 누리는 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 점에서도 드러난다.

우리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역사를 속수무책으로 만드니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헤치는 자"(눅 11:23)라 하심과 같다. 소위 "하나님의 축복 받아 잘 산다"는 기복(祈福)주의 신앙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라 세상 종교, 성경적 복음(福音, 복된 소식, 좋은 소식, 반가운 소식)을 기준하면 이단인 것이다. 그것을 주창하는 자가 아무리 능력을 행해도 그것은 사이비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고후 1:4)일 뿐이다.

그가 나타내는 소위 "능력"은 사탄으로부터 나는 것 외에 달리 아무 것도 아니다. 오늘날 그런 식으로 현혹하는 일이 부쩍 늘고 있다. 얼마 전 소위 "신유(神癒)의 은사"라고 하여 각종 질병을 나타내던 이른바 "부흥사"가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 나은 질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며 많은 돈을 "헌금"이라 하여 쾌척했다. 결과 그 "부흥사"는 치부하고 "하나님의 축복 받아 병도 고치고 구원도 받고 세상에서 보란 듯이 잘 산다"는 식으로 선전, 그 본을 보인다 하여 최고급 자가용을 몇 대씩 굴리고 다녔었다. 거금을 들여 자기 이름으로 종합대학도 세웠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물론 있다. "기독교"가 번창하는 곳에서는 사탄은 그런 식으로 독버섯처럼 화려하게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룸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성령의 은사(gift)"는 한 몸으로서의 기능을 원활하게 하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만들기로서, 능력만 나타낸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고, 자기 부인과 매일 십자가 지는(하나님 앞 사형수를 구원해내자는 것이므로 그 사형수의 모습이 되어 그 저주와 형벌을 함께 나누어 지겠다는 의미의) 기본 기조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이신 방법이다. 

그런 것 없이 초능력만 발휘한다고 해서 "은사"가 되지 않는다. 사탄의 모방 행위의 특징은 이런 자기 부인이 없다는 것이고 구원의 대상인 '하나님 앞 사형수'의 저주 받은 모습으로 그 상대와 스스로 하나되어 그 형벌을 나누어 지는 형상이 됨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 데에 있다. 자기를 위해 죽음의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뜻대로 않는데 어찌 머리의 지시를 받는 그 몸의 한 지체가 되겠는가. 그러니 세상과 벗하고 세상에서 호강하겠다는 생각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운다고 하여 일부러 인도의 소위 "성자(聖者)"들처럼 고행(苦行)하라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구원의 말씀을 명확하게 전달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고난은 약방의 감초처럼 따르게 마련이다.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인 용 사탄이 이렇게 인생 구원의 사업을 좌시하고 있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탄압이 없다는 것은 실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 된다. 초대교회는 각 시대 모든 교회의 본으로서 가동되기가 무섭게 핍박이 닥쳤다. 믿는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그 때문에 복음 확산이 되는 것이기도 했었다. 이 동네에서 핍박하면 저 동네로 가서 말씀을 전파하라 명령하신 그대로다.

그런데도 로마 천주교의 핍박 아래에서 마리아 숭배를 거부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더 이상 성경적으로 배우지 않고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세상 살기를 선호하고 물 좋고 산 좋은 고장에 남아 살기를 바라 "우리는 선량한 시민인데 왜 보호를 해주지 않느냐"며 국가에 탄원서를 내기까지 했으니, 그래서 복음 전파의 물길은 막히고 썩는 웅덩이로 변해 간 것이다. 12세기 "왈도파(Waldenses)"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 모든 헛된 미망에서 벗어날 때이다.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그리스도와 하나된 이들은 세상에 살아남을 수가 없게 된다. "이마나 손에 표를 받지 않은 자는 매매 자체가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계시록에 명시된 대로 사람 사는 곳에서 살지 못하니 히브리서에 적힌 것처럼 산으로 바위 굴로 숨어들 지경에까지 이를 수밖에 없다(히 11:35-38). "모든 민족에게 증오의 대상이 된다" 하신 그대로다(마 24:9). 

세계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 준 적 그리스도를 반대하니 너희가 바로 사탄의 무리가 아니냐 하게 되므로 필연적인 결과다. 그래서 하나님(적 그리스도가 가장하는)을 섬기는 예배라 하면서(요 16:2) 족치기 시작할 것이다. 이미 그런 사례는 많았으나 전세계적으로 전개될 전망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 사실 앞에서 또다른 교리를 만들어 소위 "휴거"라는 것을 지어냈다. 즉 그런 환난의 때가 오기 전에 믿는 이들은 공중으로 들려 올려진다는 맹랑한 발상이다.

이는 끝까지 세상을 사랑하고 안일을 탐하겠다는 고집인 것이다. 바울이 말한 바 "우리 살아남은 자"(살전 4:17)는 그런 고난 중에서도 살아남은 자 다시 말해 적 그리스도를 응징하기 위해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 살아남은 자가 몇이나 되는지 밝히지 않았다. 두 셋이 되어도 거기 해당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죽은 자가 먼저 부활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함께 오는 이들과 대조되어 살아남은 자 역시 변화한다는 사실에다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

"우리"라 했다고 바울을 포함한 것이라 억지 해석을 할 필요는 없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예언이므로 그런 것이다. 이 구절을 베드로가 적절히 경고한 대로,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르는"(벧전 3:16) 것이다. 상식적인 논리에도 맞지 않다. 고난 받는 것이 주님의 뜻인데 왜 굳이 그런 환난을 기피하려 들 것인가. 교회의 생명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 고난에 동참함에 있으니 한 몸이기 때문이다(고전 12:26/딤후 2:3/1:8/히 11:25).

이미 설명한 대로 세상이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음은 인류 구원에 있고, 이 구원은 한 몸되는 이치를 따라 함께 고통 받는 토대 위에 이루어지는 역사(役事)다. 때문에 만물이 함께 고통 당하는 판에(롬 8:22) 나만이 그 고통에서 제외된다면 구원 곧 영원 생명에서 제외된다는 것과 동의어가 된다. 그런 고로 복음 전달의 사업이 완수되면 세상도 끝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24:14). 그런즉 이러한 고난 받음을 터전으로 하여 드리는 기도가 구원의 역사를 낳는 것이니 만사 젖혀놓고 기도에 힘쓰는 것 자체가 이러한 고난에 들어가는 양상이기도 하다.

사도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專務)하겠다며(행 6:4) 기도를 앞세운 것을 보라. 기도 없이 행하는 설교, 기도 없이 행하는 전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명령을 무시하는 일체의 삶이 무의미한 것이 이 때문이다. 바울이 전도의 일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서도 2년간이나 구금되어 있던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크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바울이 복음 전하느라 기도 시간을 크게 할애하지 못했던 결점을 보충 보완하려 하심이었다.

분명히 알 것은 지금 이 때는 해산의 수고를 하는 때이다. 성령께서도 그 산고의 신음 중에 우리 위해 기도하신다 하였고(롬 8:26) 모든 피조물이 그 산고 중에 신음한다고(롬 8:22) 기록되었거늘, 어찌하여 당신은 거기서 그 영광스러운 한 몸의 일에서 스스로 배제되기를 바라는가. 그것은 자멸 곧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17-18).

영원히 받아 누리게 될 영광을 놓고 어찌하여 그 영원에 비하면 한 순간이라 할 수 있는 고난을 마다하는가. 너무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이 아닌가. 스스로 판단해도 단죄를 면할 길이 없지 않은가. 세상에 단 맛과 쓴 맛이 병존하여 조화를 이루는데 어찌하여 일방적인 단 맛만 요구하는가. 그것도 다른 이들 구원하기 위해 받는 숭고한 고난 고통이니 곧 산통(産痛)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 위해 십자가로 나아가시면서 명백히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않는다"(요 16:21) 하셨으니 우리도 의당히 같은 말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신 덕에 나는 영생 얻으리라는 생각에만 한정되고, 함께 두 팔 걷어붙이고 사람 살리는 고귀하고도 숭엄한 일에 몸 바쳐 죽도록 일해보자는 생각이 당신을 휘어잡지 못한다면 실로 당신은 갈 데가 없다. 오직 가는 곳은 한 곳뿐이다. 그래서 이 세상 유혹이 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서기를 "힘쓰라" 하셨고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눅 13:24)고 경고하신 것이다. 때는 얼마 남지 않았다. 지체하지도 않는다. 다니엘의 20세기를 지칭하는 예언은(단 12:4) 이미 이루어져 있다. 진실로 "결단, 결정의 골짜기"(욜 3:14)에 정히 위치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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