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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1일 목요일

3위1체의 법칙을 배경으로 하는 최신의 물리학적 발견


모르니까 어렵게 말할 수밖에 없고 복잡하게 생각될 수밖에는 없다. 자신이 들어도 알쏭달쏭한 어휘를 구사하며 말하다 보면 급기야는 지쳐 버리게도 된다. 어려워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문제 접근 방식을 시작부터 그르쳤기 때문이다. 첫 단추를 말못 꿰면 그 후로 아무리 몸부림쳐도 오도가도 못한다. 그 때는 모든 것을 미련 없이 확 풀어 버려 포기하고 처음부터 새로 초보부터 배운다는 각오로 겸허하게 움직이는 것이 필수이다. 사물의 이치는 간단하다. 너무나 단순 명료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사람에 한해서 진리가 열려지기 위해 일부러 헝클어뜨려져 있는 내용으로 성경이 퍈찬되게 하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다. 계시가 아니면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말씀도(마11:27) 사물의 이치 자체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교만한 자를 걸러내시고 겸손한 자에 한정해서 진리를 나타내시려 함이다. 믿음에 들어오는 자도 오만한 자는 절대로 해당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간단하게 짝의 원리ㅡ여기서부터 시작할 것.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짝"으로 계시니까 당신께서 계시는 모습을 따라 우주 만물의 창조 및 유지 존속의 기틀로 삼으셨다는 것이야 누구나 수긍이 갈 수 있는 사실이 아닌가. 오만하여 고집스럽게 창조주의 진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데 모든 화근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짝의 이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본성적으로 깨칠 수 있는 것이지 어떤 고매한 것이어서 평범한 일반인은 감히 가까이할 수도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음양론을 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3위1체의 법칙은 바로 이 성경에 의해 그 양자 관계의 성격이 밝혀졌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결정적으로 검증해 주는 것이 3운법칙이라는 것. 얼마나 간단 명료한가. 그리고 여기서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법 즉 법칙이 나왔으니, 한 몸 체제서의 머리와 몸 관계이고, 이는 곧 하나님께서 짝으로 계심과 같은 다시 말해 어버이와 자식 관계로서 갑은 을을 파생시켰고 을은 갑으로부터 퍄생된 관계로서 성질이 상대적이라 정반대가 되어 있다는 것만 알변 되는 것뿐이다. 이와 같이 가장 이상적인 삶의 도리가 알려졌다는 것만 해도 이 법칙의 진리로서의 확고부동함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임이다. 철학자든 과학자든 겸허하라ㅡ당부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렇지 못하면 학문적 성과가 문제가 아니다. 자기 영혼을 영원히 비극 속에 가두는 것이다. 





 

아래 김상욱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 3위1체의 법칙을 그 성격 그대로 앵무새처럼 답습하여 해설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해 현대 물리학의 최신 흐름은 3위1체의 법칙(Trinity Principle, trini law, the universal law)에 집중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아직 3위1체 법칙이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탓에 그 구체적 특성 즉 대립하는 양자 관계가 모자(母子) 관계라는 것만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노자(老子)와 장자(莊子) 수준에 그대로 머물고 있다. 그러나 그 윤곽만큼은 오늘날의 첨단 물리학에 의해 밝혀져 있다는 것, 이것은 대단한 것이다. 독자들에게 참고가 될까 하여 옮겨 놓는다.




서로 모순되는 것이 공존하는 세계
양자역학이 밝혀낸 ‘상보성’
우리는 자연의 이치를 알 수 없는 것인가


김상욱/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

서로 대립되는 두 명제 중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 하지만 빛이나 전자는 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입자성·파동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장자가 말한 ‘이것이 저것이고 저것 또한 이것’인 셈이다. 양자역학은 양립할 수 없는 두 개념이 혼재하는 이중성, 상보성이 자연의 본질이라는 것을 비로소 발견했다.

‘이것’은 또한 ‘저것’이다. ‘저것’ 또한 ‘이것’이다. 장자(莊子)는 이것과 저것의 대립이 사라져버린 것을 ‘도(道)’라고 했다. 대립되는 두 개념이 사실 하나의 개념이라는 생각은 동양인들에게 익숙한 철학이다. 음양(陰陽)의 조화라든가, 중용(中庸) 같은 것도 대립하는 개념 사이에서 옳은 쪽을 찾기보다 둘을 조화시키는 동양의 지혜다.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대립되는 두 명제 가운데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 이런 이분법은 선악개념에 기초한 기독교에서 친숙하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대립물을 하나로 보는 생각을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20세기 초 현대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이 발견한 것은 어쩌면 동양의 오래된 지혜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념이 혼재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물리학에서는 이것을 처음에는 ‘이중성(duality)’, 나중에는 ‘상보성(complementarity)’이라는 용어로 공식화시켰다. 상보성의 중요한 예는 하이젠베르크가 찾아낸 ‘불확정성의 원리’다. 이 원리는 물리학자들이 자연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제약을 가한다. 이제 물리학자는 우주를 완벽하게 기술하는 전지적(全知的) 위치에서 주관적이고 확률적이며 불확실한 세상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많은 사람들이 양자역학과 동양철학 사이의 유사성에 흥미를 갖는다. 서양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는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에서 그 유사성을 자세히 정리했다. 이런 유사성은 그 자체로 흥미롭지만 과학적으로 큰 의미는 없다. 과학은 실험적 증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은 생각의 틀을 제공하는 법이다. 독일인 친구 물리학자가 ‘이중성’을 받아들이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어렵기는 했어도 큰 거부감은 없었다. 아니 동양인으로서 경외감마저 들었다. 


물리학자들은 이런 논리적 모순을 어떻게 자연법칙의 하나로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서양철학을 근본부터 뒤집은 과학혁명의 순간을 살펴보기로 하자. 바로 이중성의 발견이다.

■ 이중성 


‘당구공’의 대립물(對立物)은 무엇일까? 물리학자의 답은 ‘소리’다. 선문답처럼 들린다. 정확하게 말하면 ‘입자’의 대립물이 ‘파동’이라는 뜻이다. 당구공과 같은 입자는 무게를 가지고 있지만, 소리와 같은 파동은 무게가 없다. 당구공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소리는 어디 있다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다. 만약 당구공이 파동같이 행동한다면 여기저기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반대로 소리가 당구공같이 행동한다면 소리의 개수를 하나 둘 셀 수 있다는 말이다. 입자와 파동이 대립물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서로 전혀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19세기 물리학의 핵심은 전기(電氣)다. 1860년대 전기와 자기를 기술하는 맥스웰 방정식이 완성되고, ‘빛’이 맥스웰 방정식의 수학적 해(解)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빛은 전기장과 자기장의 파동, 즉 전자기파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전자기파를 이용한 무선통신의 탄생과 함께 20세기가 시작된다. 바로 이 순간 물리학자들은 모순에 부딪힌다. 빛이 파동이라는 사실이 확립된 바로 그때 빛이 입자라는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첫 번째 증거는 ‘흑체복사’라는 현상이다. 복사(輻射)란 빛을 내는 것이다. 온도를 가진 모든 물체는 빛을 낸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깜깜한 방에서는 안 보이는 걸까? 사람은 체온에 해당하는 흑체복사, 즉 적외선에 해당하는 빛을 낸다. 인간의 눈은 적외선을 볼 수 없다. 적외선도 전자기파의 일종이다. 적외선을 감지하는 야시경을 쓰면 깜깜한 방에서도 사람이 보인다. 태양도 빛을 낸다. 섭씨 6000도라는 표면의 온도는 태양의 빛을 흑체복사이론으로 분석해 알아낸 것이다.

흑체복사이론은 막스 플랑크(191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제안한 것이다. 이 이론에는 기묘한 가정이 하나 필요했다. 빛의 에너지가 특정한 값의 정수배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돈이라면 빛의 에너지는 반드시 100원, 200원, 300원 등만 가능하다. 120원이나 145원은 안된다. 이런 기묘한 상황을 설명하는 손쉬운 방법은 빛이 100원짜리 동전으로 돼 있다고 하는 거다. 빛이 입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빛은 파동이다! 플랑크는 보수적인 사람이라 차마 빛이 입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빛이 입자라고 처음으로 용감하게 외친 사람은 당시 특허청 말단 직원이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921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이었다. 


빛이 입자라는 두 번째 증거는 ‘광전효과’다. 금속에 빛을 쬐면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이다. 사실 이 실험은 금속에 전자를 충돌시켜 빛이 나오는 실험을 거꾸로 한 것이다. 당시 금속에 전자를 충돌시켜 발생한 엑스(X)선이 화제였다. 엑스선을 사람에게 쬐면 몸속의 뼈가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엑스선도 전자기파의 일종으로 밝혀진다. 빌헬름 뢴트겐은 엑스선 발견의 공로로 1901년 제1회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아무튼 엑스선 발생과정을 거꾸로 하면 이번엔 전자가 튀어나온다. 여기까지는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쬐어준 빛과 튀어나온 전자의 에너지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흑체복사 때와 같이 빛의 에너지가 띄엄띄엄하다는 가정을 해야 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빛이 입자라고 용감하게 주장했지만, 당시 대부분의 물리학자는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빛은 파동이니까. 결국 빛이 입자라는 세 번째 증거가 나오자 비로소 물리학자들은 빛의 입자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1920년대 초 아서 콤프턴(192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이 빛으로 당구공 실험을 해 빛이 입자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당구공을 서로 충돌시키면 어떻게 행동할지 뉴턴역학으로 완전히 기술할 수 있다. 콤프턴은 빛이 당구공같이 행동한다는 사실을 보인 것이다. 


이제 물리학자들은 서양과학사의 최대 모순에 빠지게 된다. 파동임에 틀림없는 빛이 입자의 성질을 갖는다. 여기서 ‘이중성’이라는 용어가 탄생한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물리학에 이중성이라는 개념이 탄생하던 1920년대, 예술에서는 ‘초현실주의’ 운동이 시작됐다. 인간의 무의식을 예술로 표현하는 것으로,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표절(Le Plagiat)’을 보면 집 안에 있는 나무 내부에 집 밖 풍경이 그려져 있다. 공존할 수 없는 개념의 공존은 이 시대의 새로운 사고방식일지도 모르겠다. 


■ 상보성 


파동인 줄 알았던 빛이 입자의 성질을 갖는다. 그렇다면 입자인 줄 알았던 ‘것’이 파동의 성질을 가질 수는 없을까? 당시 물리학자들은 원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원자는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로 구성된다. 닐스 보어(192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수소 원자를 설명하는 이론을 내놓았지만 모든 물리학자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말도 안되는 가정을 포함하고 있어서다. 보어의 이론은 맥스웰 방정식을 무시하는 듯했고, 심지어 전자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순식간에 이동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위기에서 물리학을 구한 것은 루이 드 브로이(192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였다. 드 브로이는 전자가 파동같이 행동한다고 주장했다.

전자는 입자다. 무게를 갖는다. 그래서 전자빔을 쬐면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세상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 당신 몸도 원자로 되어 있다. 원자는 전자와 원자핵으로 구성된다. 전자가 파동이라면, 당신 몸이 소리로 되어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전자의 파동성은 큰 저항 없이 물리학계에 받아들여진다. 이미 빛의 이중성이라는 더러운(?) 꼴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빛과 전자는 왜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갖는 것일까? 이 두 성질은 물리적으로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무선 통신을 할 때 빛은 파동으로 행동하지만, 광전효과실험에서 빛은 입자로 행동한다. 이 두 실험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 둘 중에 하나의 실험을 하면 빛은 입자와 파동, 둘 중 하나로 결정된다. 마치 남자냐고 물으면 남자가 되고 여자냐고 물으면 여자가 되는 귀신과 같다. 전자도 마찬가지다. 사실 양성자, 중성자 등 물질을 이루는 모든 기본입자뿐 아니라, 이들이 모여 만들어진 원자도 전자와 같은 이중성을 갖는다. 이중성은 자연의 본질인 것 같다. 여기서는 질문이 존재를 결정한다. 보어는 이중성의 이런 특성을 ‘상보성’이라 불렀다. 


힌두교의 경전 우파니샤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것은 움직인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멀다. 그리고 그것은 가깝다. 그것은 이 모든 것 속에 있으며 이 모든 것 밖에 있다.’ 상보성은 모든 대립물이 동시에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상보성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잘 정의된 물리적 성질들이다. 상보성은 불교 시인 아슈바고샤가 이야기한 “그러한 것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요,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와 같이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실험을 하면 대립물 가운데 하나로 답이 정해진다. 상보성은 정반합(正反合)의 철학과도 다르다. 상보성은 정(正)과 반(反)이 공존한다고 말할 뿐이다. 둘이 융합해 새로운 합(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실험을 하면 대립물 가운데 하나만 옳다. 


상보성 개념을 제안한 보어는 1937년 중국을 방문한다. 거기서 그는 태극문양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양자역학을 이해할 사고의 틀이 서양에는 없었지만, 동양에는 있었던 것이다. 1947년 보어는 물리학에 대한 그의 공로로 덴마크 귀족 작위를 받게 된다.

‘상보성’ 개념을 제안한 닐스 보어는 양자역학을 이해할 사고의 틀로 자신의 귀족 예복에 태극문양을 새긴 뒤에 ‘CONTRARIA SUNT COMPLEMENTA(대립적인 것은 상보적인 것이다)’라는 라틴어 문구를 넣었다. 


■ 불확정성 


상보성의 대립물 가운데 물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위치와 운동량이다. 운동량이란 물체의 질량에 속도를 곱한 양이다. 그냥 속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신 앞에 있는 스마트폰을 보자. 스마트폰이 보인다면 위치는 당연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속도는 어떨까? 당신 손 위에 정지하고 있으니 속도도 아는 거다. 하지만 위치와 속도, 둘을 동시에 정확히 안다면 상보성에 위배된다. 이게 말이 되나? 상보성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전자나 원자와 같은 기본입자들이다. 이들은 엄청나게 작다. 당신 손톱 위에 1억개의 원자를 일렬로 늘어세울 수 있을 정도다. 상보성에 따르면 이렇게 작은 원자의 위치와 속도는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3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발견한 ‘불확정성 원리’다. 


위치와 속도를 모두 정확히 알 수 없다면 물체의 운동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부산에서 출발한 자동차가 시속 100㎞로 1시간 달리면 어디에 있을지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자동차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속력이 얼마인지 모른다면 1시간 후의 위치를 알 방법은 없다. 불확정성 원리가 옳다면 우리는 원자에 대해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한마디로 모른다는 거다. 불확정성 원리가 말하는 무지(無知)는 우리의 실험장비나 감각기관의 부정확성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상보성, 그러니까 자연의 근본 원리로서의 무지, 본질적인 무지다.

뉴턴의 물리학은 물체의 운동을 완벽하게 기술한다. 우리는 언제 일식이 일어날지, 언제 화성이 지구에 가장 근접할지 알 수 있다. 17세기 이래로 물리학이 승승장구한 이유다. 하지만 원자에 대해서는 결론이 ‘모른다’는 것이라니…. 양자역학이 발견한 물리(物理), 즉 사물의 이치는 결국 불가지론(不可知論)이란 말일까. 아니다. 양자역학은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과학 이론 가운데 가장 정밀한 결과를 준다. 더구나 20세기의 첨단 과학은 대부분 양자역학의 자식이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8102101005&code=610100#csidxe5cf0c8eefe53498b230f15fcc192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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